미국인 선교사 사무엘 F. 무어가 세운 동막교회
미국인 선교사 사무엘 F. 무어가 세운 동막교회
  • 이영석 기자
  • 승인 2019.08.10 12: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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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포나루 부근 초가 7칸으로 시작된 역사의 장소
동막교회 100주년 기념 ‘모삼열 기념교회’ 지정
대한민국 종교계 소중한 전시관 ‘동막교회역사관’

마포구 독막로 266에 위치한 옹기골 동막교회 앞에 다다르면 새벽을 울리는 종을 비롯해 한국의 라브라함 링컨, 백정전도의 개척자, 백정 해방운동 지도자로 불리는 사무에 F. 무어 선교사의 기록과 기념비, 조경의 장로 순교비 등이 눈에 들어온다.

이정환 동막교회 집사님(한국드림관광 회장) 안내를 받아, 교회를 들어서면 옹기골을 상징하듯 동막교회 옹기와 카페에서 봉사하시는 교인들이 취재를 위해 방문한 기자를 반갑게 맞이해 준다. 이어 동막교회 곽재욱 담임목사님 안내로 시작된 동막교회 취재는 마포에 한국종교계의 중요한 역사는 물론, 토마스 목사, 알렌, 언더우드, 아펜젤러 외에도 조선에 장로교를 전파한 역사적 인물인 사무엘 F. 무어 선교사의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가 숙여졌다. 사무엘 선교사의 기념교회로 지정돼 대한민국 성지순례의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동막교회를 곽재욱 목사님의 인터뷰를 통해 소개한다.

곽재욱 동막교회 담임목사

Q. 동막교회는 오랜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데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A. 동막교회는 115년 역사를 간직한 장로교회로 지금으로부터 115년 전, 미국 시카고 서남쪽 30km 지점에 있던 힌즈데일장로교회에서 사무엘 F.무어(이하 조선이름 모삼열라 표기) 선교사를 조선으로 파견, 조선 선교의 꿈을 갖고, 가족과 함께 1892921일 제물포항에 발을 딛었고, 사역하신 현장입니다.

당시 조선땅은 성 안과 밖이 엄격히 구분되던 시기였고, 성안, 지금의 인사동 승동교회(당시 곤담골교회)가 동막교회보다 10년 정도 앞서 세워졌다. 이 교회에서 일어난 문제를 먼저 이해하는 것이 동막교회 설립 의미를 이해하는 것과 직결됩니다.

모 선교사는 조선에 도착한지 1년만인 18936월 조선에서 2번째 장로교회인 곤담골교회(현재 승동교회)를 설립했고, 역사에도 기록돼 있듯 이 교회에서 모 선교사가 백정들을 교인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백정은 조선시대 7가지 천민 중 가장 밑바닥을 형성했는데, 당시 성안에 있던 양반들이 기독교인 되었을 때, 백정과 함께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불가능했지요. 결과적으로 이 교회가 모 선교사를 배척했고, 당시 함께 전도활동을 하던 천광실 조사(현재 전도사의 옛이름/동막교회 첫 조선인 목회자)와 함께 마포로 이동해 전도활동을 펼치며 초가7간을 모아 설립한 곳이 마포 동막 나루터에 설립된 동막교회입니다.

모 선교사는 동막교회 뿐만아니라 전도여행을 즐기며 황해도, 경기도, 강원도에 수십개의 집회장소와 교회를 개척했고, 특히 강원도는 1898년부터 2년 동안 12개의 집회장소와 6개 교회를 세웠고, 가장 활발한 전도활동을 한 황해도 백천군에서는 44명에게 세례를 주었고, 38명의 지도자까지 배출했고, 이들의 전도활동으로 190629개 집회장소가 세워지고, 신자수는 930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모 선교사는 1892년부터 1906년까지 14년 동안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했으며, 백정해방운동, 남녀평등사상 보급, 사회계급주의 타파, 우상배척 운동, 수많은 장로교회 설립, 그리스도회보 창업 등의 업적은 한국 선교사에 한 획을 그을만한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한국의 아브라함 링컨으로 불렸던 모 선교사는 190612월 폐결핵으로 재중원에 입원해 5주간 병마와 씨름하다가 48세의 젊은 나이로 하나님의 품에 안겼고, 동막교회 교인들은 꽃으로 장식한 관에 시신을 모시고, 장례예배를 드린 후, 정동예배당에서 선교사들 주관으로 발인예배를 드리고 양화진(마포구 합정동 소재) 선교사 묘지로 모셨습니다.

북장로교 선교보고서에 따르면 모 선교사의 죽음에 대해 무어 선교사의 죽음은 한국복음화 사역에 엄청난 손실이었으며, 그의 삶 속에서 행한 노력과 그 영향력은 매우 지대한 것이었다로 기록돼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교회 부흥을 위해 헌신한 모 선교사를 기억하는 한국성도가 너무 없어 그의 기념교회인 동막교회는 추모비를 다시 세우고 묘비에 다음과 같은 글을 기록했습니다.

조선인사를 사랑하였고 또 그들을 예수께로 인도하기를 원하였더니 저의 수고를 그치매 그 행한일이 또한 따르느니라

동막이란 이름은 옹기를 굶거나 저장해서 대량으로 판매하던 곳을 의미하며, 전국에 동막이란 지명을 가진 곳이 몇 곳 되는데 그중 전국에서 가장 크고 저명했던 곳이 바로 이곳입니다.

이곳 동막에서 설립된 동막교회는 상권, 교통로의 중심인 마포에 자리해 있고, 승동교회 반상의 차별을 넘어선 모든 교회를 아우르는 교회로 시작됐습니다. 사실 이곳이 평민 중심의 교회로 시작됐다고 생각합니다.

그 당시 조선 최초의 순교자 토마스목사를 비롯해 알렌, 언더우드, 아펜젤러 등 대부분 외국 선교사들은 위에서 아래로 선교했지만, 모 선교사는 이곳에 자리 잡으면서 평민들로부터 선교를 시작한 분으로 최근 한국의 시대적 조류가 바뀌고 역사학에 대한 인식이 바뀜에 따라 한국 교회사에 대한 평가도 바뀌고 있으며, 모 선교사가 대한민국 장로교의 중심에 서 있고, 우리 동막교회도 신앙의 기본이자 철학인 모 선교사의 의지를 받들어 전도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동막교회는 분명히 다른 교회와 역사적 기원부터 시작해 확실한 차별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현재 신도는 1,000여명 정도로 지속적으로 성장해 오고 있으며, 모 선교사와 동막교회의 업적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한 동막교회역사관도 만들어 운영하고 있습으며, 모 선교사의 업적이 한국교회에 중요한 모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Q. 장로교 정통의 길을 걸어온 곽 목사님의 목표는?

A. 어느덧 동막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한 지 20년이 되어 갑니다. 그 이전에는 우리 장로회 신학대학을 비롯해 국내외 여러 대학에서 강의를 했습니다. 신학의 학문보다는 목회라고 하는 것이 단순 교인만 아우르는 것이 아닌 그 지역을 아우를 수 있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식과 관심을 확대하기 위해 노력해왔고, 혼란기를 겪고 있는 한국 교회의 본질은 그 이전에 한국 교회가 가지고 있던 틀이 지금 변화된 시대 가운데 그대로 적용이 안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판단합니다. 그동안 물량적인 대교회가 만들어지고 재정력을 겸비해서 좋은 시스템을 제공했다면, 실제에 있어서 철학을 가지고 그것을 토대로 프레임을 만드는 교회는 아직 없습니다. 한국 교회가 앞으로 현재 상황을 타개하고, 앞을 향해 나가기 위해서는 새로운 시대와 새로운 문화에 적응할 수 있는 새로운 틀을 만들어야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동막교회 목회자 및 담임목사로서 나아가 대한민국 교회 목회자로서, 이 시대를 열어나갈 수 있는 한국 교회의 새로운 틀을 만들고, 그것을 통해서 목회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싶습니다. 제안뿐만 아니라 그것을 실제적으로 효율성 있는 모델로서 제시할 계획을 가지고 있으며 남은 목회인생을 그것을 위해 집중할 것입니다.

 

Q. 목사님 동안의 비결은?

A. 심리. , 마음을 편안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목회자들은 삶의 전반을 이야기하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신념을 이야기를 합니다. 물론 완벽하지는 못하지만 최소한 신도들 앞에서 설교하고 마음에 평화를 이야기하면서 내 자신부터 실천하고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지는 것이 도움이 됐다고 생각합니다.

신학을 하기 전에는 미술에 관심이 있었는데 목회를 하시던 선친께서 반대하지 않으셨다면 목회자가 아닌 미술가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현재도 시간이 날 때 그림을 그리고 대학시절 배웠던 기타연주로 찬송가를 부르기도 합니다. 아직 예술적인 감각이 남아 있는 것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Q. 동막교회 역사관은?

동막교회 역사관은 교회 설립 100주년과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교회의 자랑스러운 역사는 물론, 선각자들을 기억하고, 가치 있는 대한민국 종교계의 사사를 기록하고, 유산을 공유하고자 추진돼 만들어진 것입니다.

역사관은 앞에 설명한 교회 설립자인 모삼열 전도사를 비롯해 오늘의 동막교회를 있게 한 다양한 자료들을 수집한 전시관으로 한국교회사에 아주 중요한 전시관입니다.

역사관은 24시간 개방돼 있으며, 누구든지 들어와 차를 마시거나 회의를 할 수 있고, 아이들 역시 동막교회의 역사와 함께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최근 새문안교회 신축교회당 건축위원장도 이곳 역사관을 방문해 벤치마킹한 후 한국교회사의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곳이라고 평가를 했습니다.

특히, 역사관 자료 중 모 선교사가 조선 황제폐하에게 설교를 하기 위해 외국인 선교사로서 한글로 쓴 편지(원본은 미국 국회도서관에 보관)’는 소중한 자료며, 이 역사관이 존재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이유입니다.

원본을 기증받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미국 국회도서관에 있는 원본은 미국대통령의 사인이 있어야만 한국으로 옮길 수 있을 정도로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어 사본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편지내용을 살펴보면 모 선교사의 서명이 있구요, 제가 한번 읽어드리면 대황제 폐하께서 보시옵소서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의 각별하신 말씀이 나 미국인 모삼열에게 있으니 여러대신 무리로 더불어 자세히 듣기를 생각하시거든 부르시길 바라옵나이다

이 편지 내용을 보면 선교사가 적극적으로 황제께 편지를 올려서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것을 들어라하는 대단한 생각이고, 당시 선교사가 저렇게 한글을 스스로 쓸 수가 있다고 하는것은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모 선교사 가족의 사진 역시 부인과 자녀들 총 6명으로 동막교회는 이들 6분 선교사 가족들의 희생의 터에 서있는 교회입니다.

그리고, 15년 전 동막교회 설립 100주년을 기념해 미국 켄턴키주 루이비에 있는 장로교 본부를 찾아 자매결연을 맺고, 동막교회가 사무엘 F. 무어 선교사의 기념교회로 지정을 받은 증서도 전시하고 있으며, 6.25 당시 한의사였던 조경의 장로님이 운영하던 약국에 치료를 받기위해 들렸던 인민군 장교에게 하나님께 구원을 받으라전도하시다가 피랍되어 총살을 당해 순교하신 조 장로의 약제도구들도 구해 전시하고 있습니다.

순교 당시에도 형제들이여 회계하고 복음을 믿으라,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의 손에 있나니 사도들의 최후를 기역하며 담대할지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또한, 옛날 재직들이 수기로 쓰셨던 회의록과 교회 앞에 전시돼 있는 새벽을 울리는 종과 순교비도 중요한 역사입니다.

동막교회당이 이곳에 건축된 것은 알렌-언더우드-민휴-모삼열 선교사로 이어지는 선교사들의 인맥과 협력의 결과며, 1884년 갑신정변 시 자객의 칼을 맞고 큰 상처를 입은 민영익을 알렌이 치료한 것이 고종황제가 미국에 대한 호감을 갖는 계기가 됐고, 언더우드 선교사가 왕실과 친분을 맺는 연줄로 이어지고, 언더우드 선교사의 조수로 일하던 민휴 선교사가 언더우드를 통해 황실에 청원한 것이 받아들여져 고종황제가 운현궁의 일부를 하사해 1906년 서울 마포구 대흥동 운현궁 소유터에 자리하게 된 것입니다.

자세한 영상소개는 유튜브에서 동막교회를 클릭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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