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불계패(不計敗)
[기자수첩] 불계패(不計敗)
  • 임채호 기자
  • 승인 2020.02.20 15: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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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화기 내려놓는 소리가 깊은 한숨과 섞여 전해진다. 영문을 물으니 당장 내일 떠나기로 한 고객의 취소전화란다.

. 한쪽에선 융자 상담 연결 대기에 지친 이가 수화기 너머 기계음을 뒤로 한 채 고개를 떨군다.

요즘 여행사 사무실은 침묵 속에 바둑알 내려놓는 탁탁 소리만 울려 퍼지는 기원(棋院)같다. 내쉬는 한숨이 깊은 것을 보아하니 좋지 못한 형국이 분명하다.

불계패(不計敗). 바둑에서 집 계산(계가)까지 가지 않고 결정되는 패배로, 스스로 돌을 던진 결과로서의 패배를 의미한다. , 더는 둘 수 있는 마땅한 수가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 이상 끌어봤자 무의미하다는 뜻이기도.

요즘 여행업계는 그야말로 돌을 던질지 말지를 고민하는 불계패 위기에 몰려있다. 사실 이전부터 크고 작은 역경이 많았다. IMF, 사스, 미국발 금융위기. 메르스, 최근에는 일본 불매운동까지. 그 모두를 견뎌왔지만, 어느새 형세는 기울어져 있었다. 그리고 폐부를 찌른 건 느닷없는 코로나19’.

이달 들어 폐업한 여행사는 벌써 20곳이 넘는다. 그중에서는 앞서 언급한 모든 사례를 모두 겪었을 설립연도 1996년의 여행사도 있다. 한 랜드사 소장은 우스갯소리로 코로나 얘기만 들으면 먹던 밥도 코로 나올 지경이라고 농담을 던진다. 그 농에 겉으로는 웃으며 반응하지만 우리는 안다. 그 속에 꾹꾹 눌러 담은 애환이 섞여 있다는 것을.

업계가 어렵다는 것은 공시자료를 통해 계산해보지 않아도 안다. 회사로 반송되는 신문들을 보면 더욱 뼈저리게 체감할 수 있다. 폐업이라고 적힌 곳도 있고, 기존 사무실의 임대료 감당이 어려워 이전한다며 배송주소변경을 요청하는 전화는 이미 수두룩하다. 알파고 앞에 무너진 바둑기사들처럼 도무지 이 사태를 당해낼 재간이 없는 것이다.

상황이 악화됨에 따라 여기저기서 훈수가 등장하고 있으나, 반전을 노릴 수 있는 묘수가 아님은 안타까울 따름이다.

중소여행사의 자금 수혈을 위해 무담보와 저금리로 준비된 융자지원은 상담 순번을 기다리는 데만 한 달, 심사부터 실제 자금조달까지 합하면 두 달가량이 걸린다. 고용유지지원금은 현금보유가 부족해 당장 인건비를 지급할 수 없는 사업자들에게 구조조정의 대안이 될 수 없다는 것이 여행사 대표들의 주된 반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지난 14일 기준 고용유지지원금을 신청한 여행업종은 122곳이고, 지난 20·21일 개최된 관광업계 대상 코로나19 피해기업 특별자금 지원관련 설명회에는 800여명이 몰렸다. 이 대국을 끝까지 끌고 가 결국에는 이겨보겠다는 강렬한 의지가 담긴 것이다. , 거꾸로 생각해보면 그만큼 어려운 현실이 증명됐다는 뜻이기도 하다.

전체 여행업 등록건수는 총 41859. 여행업은 몇몇 대기업과 중견기업만이 이끄는 산업이 아니다. 그러니 정부의 정책 기조가 서민경제를 위하는 것이라면 여행·관광업을 더욱 주목해야한다. 정부의 정책 방향에 여행업이 늘 피해받아 왔다는 점도 외면해선 안 된다.

불계패를 목전에 둔 지금. 업계는 신의 한 수를 목마르게 기다리고 있다. 알파고를 꺾으며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든 이세돌의 78번째 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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